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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

2017.11.29 20:34

Admin 조회 수:39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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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4/23/17 11:33-38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우리는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자신을 나타내셨다. ‘옛적에는 구약시대를 가리킨다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 등 하나님과 밀접히 교제했던 인물들을 비롯하여 사무엘로부터 시작하여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을 거쳐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구약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을 다 포함한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씀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내용들과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1)하나님께서는 간혹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기도 하셨고 2)어느땐 역사의 사건속에서 나타나셨으며, 그보다 빈번하게는 3)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타나심 속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보다 더욱 빈번하게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서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성령의 이러한 감동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한 나타나심과 말씀과 또 때때로 행하신 기적들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이것들을 통틀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는 돌이나 나무 같은 무인격체나 비인격체가 아니시고, 인간과 같이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계시들을 성경책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이 책의 내용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4:2; 12:32; 22:18-19).

그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신약시대를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부른 것은 그 시대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歷史)에서 마지막 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임을 보인다.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를 비교하면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있었지만, 신약 계시를 넘어서서는 어떤 내용의 보충도 없을 것이다. 신약 계시는 마지막 계시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계시의 내용상 추가가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이믿음의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 대열에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예들이 더 많지만 그것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단지 몇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고, 그가 언급한 혹은 언급하지 않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체험에 대해 열거한다.

앞에서 언급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경험들을 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 같은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삼상 12:4; 삼하 8:15). 또 다윗 같은 이는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삼상 16, 17; 삼하 5: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다(6)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3). 

다윗이나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앞에서 언급한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군대의 진을 물리쳤었다.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왕상 17; 왕하 4).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므낫세 때에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었는데(왕하 21:16)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크레이톤 아나스타시스)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아나스타시스)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경건한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대하 16:7-10).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하였다(왕상 22:24-27). 

또 선지자 예레미야는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20:2)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37:16; 38:6).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다(대하 24:21). 

또 전해오는 말12)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삼상 22:18).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다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는 원어(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KJV, NASB, NIV)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 믿음이 19세기까지 이어오다가 여기 누워 있는 이 마포삼열 선교사님에게로 이어졌다

-한국명 마포삼열. 본명은 ‘Samuel Austin Moffet'이다. 인디에나주 메디슨 출생으로

1884년 하노빌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멕코믹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889415일에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890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 서울 마포나루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무엇보다도 모펫의 가장 큰 업적은 지도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교육에 힘 쓴 것이다. 그는 조선인 목사 양성을 위하여 1901년에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반을 시작하여 1903년에는 조선 최초의 평양장로교신학교 초대교장이 되었고 1907년에 최초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 받은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진백 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그는 1924년까지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그 후 신사참배문제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많은 장로교회 목사들과 여전도사들이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되었다.

-그는 장로교신학교 외에도 평양에 3(三崇)이라고 불리우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 여학교 등을 세워 젊은 인재교육에 힘썼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8대 총회장을 역임한 후 10여년 동안(1919-1928)은 숭실학교 교장으로 시무하면서 일본의 압제에 맞서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인재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기미만세사건이 일어난 다음해 19204월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모펫은 금일 조선에 가장 유망한 점은 조선민중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호응함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 . .독립적 정신을 가지게 하며, . . .민중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며 정의를 위하여 튼튼히 설지라.” 라고 자신의 소신과 사명을 분명하게 밝혔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을 찾아와서 오직 조선민족의 복음화와 독립을 위하여 모든 정성을 쏟았던 모펫은 193470세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로부터 은퇴하고도 계속 조선에 머물면서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맞서서 싸우다가 1936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조선땅에 묻히기를 바랐던 모펫은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으니 1939102475세를 일기로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한국인을 사랑한 馬布 목사님"

마포삼열 목사의 절절한 한국 사랑. 일본 총독부가 밀어부치던 신사참배 문제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나선 마포삼열 목사는 한국 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선교사들 중 가장 중심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일본 총독부로선 언제나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던 것. 일본 헌병에 의해 감시를 받아오던 마포삼열 목사에게 암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다 준 사람은 뜻밖에도 일본 총독부 관리의 아내였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자신이 우연히 듣게 된 정보를 평양 선교부에 급히 알려줬던 것이다. 그녀는 사태의 시급성을 알리며 어떠한 환송회나 모임 등을 일절 갖지 말고 무조건 떠날 것을 요청했으며, 마포삼열 목사는 일본 헌병의 검속을 피해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낮 시간을 택해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황급히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기선 안에서 친 전보를 받고서야 아버지의 귀국 소식을 알게 됐다는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는 잠시 피신차 귀국한 미국에서 여러 번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도했으나 한국내 정세의 악화로 이같은 노력이 번번히 무산되면서 심장 질환이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온 것 뿐 아니라 자신의 평생의 선교 사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상황에 더욱 절망했던 것이다.-마포삼열 목사의 귀국후 별세하기까지의 3년여 삶에 대해 담담히 입을 연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가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막내가 돌아온 후 로스엔젤레스 몬로비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집은 당시 창고를 개조한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 집은 정식 번지 등록조차 안돼 00번지 2/1로 명기되었는데 아버지는 이 곳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

-넷째 아들인 고 헤이워드 마펫은 증언했다.

당시 형(마삼락)은 신학교 재학 중이었고, 자신은 의대 재학 중이었으며, 막내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생활의 여유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현재 몬로비아 제일장로교회 바로 옆에 있는 그 집은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역사 속에 묻혀있다. 그는 아버지 묘지에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고 밝혔다.

 

-마포삼열선교사가 만난 조선 사람들 이야기

189310월 마포삼열이 한국에 온지 9개월만에 평양 개척역사가 시작되었다. 개척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다. 마포삼열은 한석진과 함께 최치향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여관주인 최치향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포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마포삼열은 수개월을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사랑방 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깡패 청년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로 돌을 던져 넣었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오기가 생겨 다시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날아간 돌은 마포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 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포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였다. 며칠을 괴로워하던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 초대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이며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된 이기풍 목사이다

이처럼 마포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 개척 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만여 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해도 257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마포삼열은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19317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기사 내용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외양으로는 그들(선교사들)이 사랑과 자비를 공헌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을 완전히 들추어 보면 술계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한국에 와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마포삼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 복종하듯이 마포의 말을 잘 듣는다. 이곳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평양 서문밖의 죄악촌'[朝日新聞]

 

-1919317일자] 이를 통해 3·1운동 당시 마포삼열이 지닌 한국인에 대한 공감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마포삼열은 한국인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했다. 그는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고자 한국 고유의 예법을 익히고 한국 음식을 즐겨먹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한국인처럼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그를 한국 사람들은 "마포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며 아버지처럼 섬겼다.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사람들과 한국을 더 사랑한 마포삼열목사에게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는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