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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소식

이상훈목사의 터키 단기선교 사역일지

2014.07.30 15:31

Admin 조회 수:143838

이상훈목사의 터키 남동부 국경지역 선교일지



글: 이상훈 목사 (His Vision Church)



4월 24일부터 터키단기선교 팀들은 4개의 조로 나누어 터키 전역, 특히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주를 중심으로 Prayer Walk을 시작했다.

나는 ITN(International Turkey Network)의 김성간 목사와 둘이서 터키의 남동부 지역을 향해 떠났다.


가지안텝
처음 도착한 곳은 가지안텝이다. 이곳은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인구가 100만 정도 된다. 고대에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동서남북을 이으며 매우 번영했던 도시였다. 이곳에서 P 선교사를 만났다.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으시기에 우리는 즉시 시리아 국경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반색을 하며 마침 자기가 시리아 난민들의 자녀를 약25명쯤 가르치고 돌보는 보육학교 사역을 하는데 그곳을 먼저 보여주고 국경도시로 이동하자고 했다. 어느 허름한 골목길 낡은 5층 아파트 맨 윗층에 방 3칸짜리를 빌려 한 방은 Preschool, 한방은 초등학교 1-2학년, 다른 방은 초등학교 3-4학년을 위해 사용하는데 방이 좁아 아이들을 더 받지는 못한다고 했다. 시리아는 아랍어 권이므로 터키어만 하는 P 선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어서 쿠르드 아랍계 크리스천 청년들 4명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우리에게도 음식을 나눠 주었다.옥수수 스프와 빵 한 조각이었다. 먹고 보니 남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식량이부족한 중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많이 미안했다. 나는 그때부터 울보가 되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가는 곳마다 눈물을 흘렸다.

 

국경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경계가 삼엄했다. 시리아에서 터키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국경 너머로 보였다. 난민들이었다. 뉴스로만 듣던 시리아 난민들을 처음으로 접했다. 먼저 들어온 이들은 혹시 자기의 가족들이 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국경에 와 있는 이들도 있었다. 이틀 전에도 시리아 정부군의 폭격으로 시리아쪽 난민촌의 사람들이 여러 명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 절망감에 사로 잡혀 있었고, 소망이 없어보였다. 숙소로 오면서 P선교사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오직 두려움에 떨던 시리아 난민만이 계속 떠올랐다.



P 사역자의 부인은 한국인 S 선교사이다. P사역자 부부와 한국인 단기사역자 두 분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 그들이 최근에 마련한 교회처소로 갔다. 교회는 4층 건물의 맨 위층에 있었다. 지난 주일에도 약 40명이 넘는 터키현지인 성도들이 예배를 드렸다고 했다. 그날 중보기도회 시간에 저녁 터키의 영혼들과 시리아 난민들, 특별히 가장 비참하게 사는 난민여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자는 소수였지만 간절함 만큼은 도시를 채우고도 남는 듯 했다. 다음날 아침 가지안텝을 떠나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다가 한 낡은 병원 뜰 안에 있던 오래된 묘지를 찾았다.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오스만터키가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때 순교한 미국 선교사님들의 묘소였다. ‘아! 그 당시 미국 선교사님들은 한국에만 오신 것이 아니라 세계 열방을 품고 가지 않은 곳이 없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미국 선교사님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아드야만
4월 25일. 돌무시라는 14인승 작은 시외버스로 아드야만이라는 도시에 들렀다. 터키는 웬만한 도시에는 칼레라고 하여 옛 성벽 터가 남아 있는데 대부분 성벽 위는 도시 전체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높기 때문에 우리는 칼레에 오르고, 사람들을 가급적 많이 만나기 위해 멜키스(번화가)가 어디 있는지를 물으며 그 방향으로 한동안 걸었다. 더위 속에서 땀을 쏟으며 걷는데 내 귀에 “안녕하세요”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주위를 살폈지만 한국인은 없었다. 그런데 자판에서 담배 장사를 하는한 터키인이 환한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이지요”하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다가 어떻게 한국말을 아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5년간 노동자로 일하다가 3년 전에 이곳에 왔다고 한다. 이름은 카야. 43세. 악수를 하는 데 엄지와 검지손가락 한마디씩이 없었다. 한국 알미늄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나쁜 고용주한테 월급도, 보상도 못 받고 쫓겨났다고 한다. 우리가 대신 한국인으로서 사과한다고 했더니 “아니예요. 한국사람 좋은 사람 더 많아요. 내가 다녔던교회 목사님, 다른 공장에서 만난 분들은 다 좋아요. 나 한국 좋아요. 다시 가고 싶어요“라고 했다. “예수님 믿으세요” 했더니 “네. 나는 예수님 믿어요. 우리 가족 아직 예수님을 몰라요. 그런데 여기에 교회가 없어요”라고 답했다.



또 눈물이 쏟아졌다. 그곳에서 내 눈은 고장난 수도꼭지 같았다.

“교회가 전혀 없어요”

“수리아 정교회 하나 있어요.”

“여기서 가까워요”

“네. 가 볼래요”

“그래요 가고 싶어요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네, 일끝나고요.”



저녁 8시쯤 일이 끝난다며, 우리는 칼레에 가서 시간을 보낸 뒤 8시에 만나서 같이 식사하고, 정교회를 방문한 뒤 자기 집에 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뒤 우리는 아드야만 칼레(성벽)에 올라가 찬양하고 도시를 축복하며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후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남쪽이라고 했더니 좋아했다. 그의 이름은 우스. 대학생 이었다. 몇 마디 말을 하다가 말문이 막혀서 이내 그 청년에게 내가 할 말이 있다고, 예수님에 대해 들어봤냐고, 잠시 말해도 되냐고 물었는데 기꺼이 승낙해 주었다.



미리 써간 터키어를 한국발음으로 쓴 글을 읽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죄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 그것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받는 것 등을 읽어 내려가는데 그는 내 발음이 틀린 것은 수정해 주며 다 들었다. 거의 수긍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믿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기도해 주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가 괜찮다고 하여 그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간절히 그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8시에 카야를 만나 곧바로 수리아 정교회를 찾아갔다. 이미 해는 떨어져 캄캄한 밤이 되었다. 문앞에 섰는데 조그마한 십자가가 문설주에 붙어 있었다. 교회가 하나도 없는 동토의 땅.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흘렀다. 벨을 누르자 한 청년이 불안한 모습으로 나왔다. 카야가 터키어로 우리의 방문목적을 말하고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승낙을 받고 뜰을 지나서 예배당에 들어섰다. 이 교회는 1883년에 세워졌는데 그 당시는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핍박을 피해 터키를 떠나던 때였다. 그런 시절 오히려 이곳은 세워졌고, 현재까지 무수한 핍박과 폭력 속에서도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할렐루야! 



기도한 뒤 그 청년들을 축복하고 교회를 나왔다.
이후 카야의 집을 방문했다.2층 집이었는데 아래층은 공장에 세를 주고 2층에는 방이 4개가 있었다. 5년 동안 한국에서 번 돈으로 마련한 집이라고 했다. 얼마나 힘겹게 일 했을 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아내와 큰 아들 그리고 딸 넷. 아이들은 예쁘고 활발했으며 가족 분위기가 밝았다. 이 가족을 위해서라면 카야는 죽음도 불사할 사람처럼 보였다. 가족들에게 복음팔찌에 대해 설명 하며 예수님을 전하고 기도했다. 함께 사진을 찍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카야는 다음날 아침 우리를 배웅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하나님! 카야가 예수 그리스도를 놓지 않게 해 주세요. 그에게 더욱 큰 믿음을 주옵소서“ 버스 안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말라티아
4월 26일. 토요일 늦은 오후에 말라티아에 도착했다. 틸만 선교사님, 네자티 목사님 그리고 우르 형제님, 세분의 순교가 일어났던 이곳을 마침내 7년 만에 밟았다. 왠지 말라티아를 생각하면 삭막하고 사람들의 눈초리가 무서운 곳, 골목마다 불길한 느낌이 존재할 것 같은 편견이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말라티아의 첫 느낌은 “참아름답다”였다. 도시를 둘러싼 푸르른 산은 정다웠고, 도시의 골목과 집들은 깨끗했다. 사람들은 해맑은 청초함이 묻어 있었다. 터키 어느 곳에서도 내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눈총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터키는 인정이 많고, 따뜻한 나라였다. 그런데 말라티아 사람들은 터키에서도 손꼽히게 다정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1시간 가량 걸어서 T 와 S 사역자 가정을 찾아갔다. 그들은 2007년 순교사건 직후 홀로 남은 틸만 선교사의 부인인 수산나 선교사를 위로하고 돕기 위해, 자원하여 앙카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선교사 가정이다. 말라티아에는 사역자 4가정이 있다. 그들은 교회개척과 제자양육에 주력하며 동역하고 있었다. 가장 연장자인 R과 L 사역자 가정, H와J 사역자 가정, 수산나 선교사, 그리고 T와 S 사역자 가정이다. R과 L은 백인가정으로 친자녀 둘을 다 키우고 분가시킨 후에 두 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키우고 있었다. 모습만보아도 존경스러운 훌륭한 인품의 분들이었다. H와 J는 늦은 결혼으로 아이들의 나이가 어려서 손주를 볼 나이에 고생하고 있다며 행복한 투정을 하는 모습들이 천진스런 아이들 같았다. T와 S는 여러면에서 이들 가운데 리더 역할을 한다. 피스메이커란 생각이 들었다. T 사역자는 마음이 부드럽고 자상한 분이다. S는 한국계 2세로서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이 의지하고 싶은 분들이었다. 수산나 선교사는 그 얼굴에 평안과 고요함이 묻어난다. 이분은 진짜 선교사라는 마음이 드는 따뜻한 독일인 아주머니였다. 이렇게 말라티아에는 세분의 순교의 열매로 만나게 된 미국인, 독일인, 한국인사역자들과 터키 현지인 사역자들이 어우러져 연합을 이룬 성경의 안디옥 교회 같은 교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다음날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10분쯤 걸어서 교회에 갔다. 상가건물 한쪽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는데 입구 위에 교회 간판이 걸려있었다. 터키어로 ‘구원의 방주 교회’라고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그들은 2007년 순교사건 이후 자기들이 기독교인인 것과 선교사임을 밝히고 사역을 하고 있다. 예배 때도 문을 닫고 비밀스럽게 진행하지 않고 오히려 문을 활짝 열어 누구라도 올 수 있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이분들은 목숨을 걸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 매일 목숨을 걸고 살고 있었다. 로마서 14:8절“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다 주의 것이로다“가 생각났다. 이 말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배는 찬양으로 시작되었다. 찬양인도자인 루카스는 순교자 틸만 선교사의 아들이다. 이 아이가 성장해서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찬양 인도자가 된 것을 보니 너무도 감사했다. 루카스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다녔던 독일 신학교에 합격된 것을 매우 기뻐했다. 그는 아버지 뒤를 이어 이 말라티아에서 제2, 제3의 교회를 개척하며 목회하는 것이 주님께 받은 사명이라고 했다. 거의 모든 교우들이 예배의 각 순서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예배분위기는 차분하면서도 은혜로웠다. 선교사님들이 돌아가면서 말씀을 전한다. 성경묵상시간에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공부한 것을 발표한다. 또한 성찬식을 매주 거행하고 있었다. 순교의 피가 흐르는 말라티아에 교회가 세워지고 40여명의 성도들이모여 예배를 드리며, 성찬식 때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들이 예배당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예배가 우리의 교회에서도 드려지기를 기도했다.



예배 이후 저녁식사 때까지 전도를 하려고 거리로 나갔다. 버스표를 사서 오는 버스를 무작정 탔다. 큰 공원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다. 벤치에 앉아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이곳에서 주를 예배 하리라’를 비롯해 몇 곡의 찬양을 부르고 기도한 후 주님이 인도해 주시는 영혼들을 찾아 몇 사람에게 전도를 했다.



4월 28일 월요일아침. T선교사가 순교한 틸만 선교사 묘소를 안내해 주었다. 묘소로 가는 길목에 한 허름한 폐허의 교회 터를 보았다. 수백 년간 믿음을 지켰던 아르메니안 교회 터였다.1800년대 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했고, 교회는 그 후 폐허가 되었다. 차에서 내려 교회 안쪽을 들여다보는데 주님의 부르심 같은 느낌에 가슴이 뭉클했다. 드디어 도착한 틸만 선교사의 묘비에는 요한복음 12장 24절‘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말씀이 터키어로 쓰여져 있었다. 무덤은 아르메니안 공동묘지 안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믿음을 지켰던 분들의 이름들이 있었다. 어느 분은 34세에, 어느 분은 더 이른 나이에 순교하신 분들도 있음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이 굳건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이번 선교의 목적 중 하나는 틸만 선교사 묘소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가지안텝에서부터 말라티아에 이르기까지 터키의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시다가 순교한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의 묘소와 교회를 보았고 틸만 선교사는 이 순교대열에 동참한 귀한 한분이셨던 것임을 깨달았다.

 

말라티아에서 디야르바크르로 가는 길에 푸르른 거대한 물줄기가 나타났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인 유프라테스 강이었다. 우리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였으며 아브라함이 머물렀던 갈대아 우르땅을 향하여 들어가는 것이었다.


디야르바크르
디야르바크르의 첫인상은 크고 오래된 도시라는 것이다. 거대한 성벽이 도시 전체를 두르고 있고 그 사이에 (다문, 울르파, 마르딘, 예니)라고 부르는 네 개의 성문을 통해 지금도 차량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12미터 높이의 성벽위에 올라 탁 트인 사방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구약시대 고대의 네 제국 이었던,남쪽으로는 앗수르,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 동쪽으로는 메대, 서쪽으로는 로마가 보이는 실크로드의 가장 큰 관문인 것이다. 그 위에 지금주님의 군사 된 내가 다시 서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나는 선포했다. “주여! 잃어버린 이 땅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다시 찾게 하여 주옵소서.”



디야르바크르 부터 동남부 쪽은 쿠르드민족의 삶의 터전이다. 나라는 터키 땅이지만 그들은 터키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매데의 후손인 쿠르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터키의 가장 소외되고 열악한 지역에서 그 땅의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한국 I 선교회 소속 4가정의 장기 사역자들과 단기 사역자들을 만났다. 함께 찬양 하고 이 땅을 축복하는 중보기도를 눈물로 올려드렸다. 사역자 가정을 축복하며 기도하는 중 10살짜리 예쁜 딸 A가 기도를 했다. 1년 전 복잡한 길거리에서 뺑소니 차량에 치여 간이 파혈되어 중상을 입고 아직도 가끔씩 입으로 피가 섞여 나오고, 창밖에 차소리만 들어도 몸을 떨며 트라우마로 고생하고 있는 아이였다. 젊은 부모들은 그렇게 자녀들을 주님께 드리면서 그 종족을 사랑으로 섬기고 있었다. 한 사역자님께“이 땅에서의 비전이 무언가요”라고 물었더니 “5월에 수박 축제가 열립니다. 지름이 1미터가 넘는 수박이 나는 도시에서 수박 축제로 세계 곳곳에서 몰려드는 인파가 100만 명 인데요. 목사님! 저의 비전은 그 100만 명 인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이 땅에서 선교대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비전을 들으며 주님께서 저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바트만
낙후된 마을 한가운데 현지인 개신교회가 하나 있었다. 그 교회의 게스트 룸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바트만 이라는 도시로 향했다. 바트만에서 한 쿠르드인 청년을 만났다. 하비브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우리를 살갑게 대하며 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부모님, 할머니, 남동생부부, 여동생들과 한집에 살고 있었다. 하비브는쿠르드어, 터키어는 물론 영어를 아주 잘했다. 우리가 복음을 전했지만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고 자기는 알라를 믿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부모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년 전쯤 한국사람 몇 명이 그 동네를 배회하는 걸 보고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그들이 하룻밤을 자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영접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 돌아가서 보내온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 단기 팀이 전도활동을 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바로 그 집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다시 2년 만에 보내신 것이었다. 그들을 축복하고 가족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했다. 특히 막내딸인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가위에 눌리는 것 같은 공포를 앓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이름으로 그 아이를 축복하자 그 아이는 마음에 평안을 얻은 듯 했다. 작별하면서 하비브에게 예수님을 꼭 믿어야 한다고 다시 이야기했던 대답 대신 다시 꼭 오라고 재차 청하기만 했다. 내가 꼭 오겠다고 하니 지나가는 말로 말고 진짜 오라고, 자기 집을 2층으로 지어서 우리들이 언제든지 오면 2층에서 지내게 하겠다고 하며 내 눈을 보는데 그의 반짝이는 눈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목사님, 다음에 꼭 와서 내게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려줘요. 그때 믿을게요.” 이런 느낌이 들어서 나는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를 주님께로 이끌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사도바울을 보았다. 그가 비록 지금은 알라를 믿고 있지만 언젠가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입에서 열방을 향한 복음의 메아리가사자의 포효처럼 뿜어 나오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깊게 포옹하고 마지막 지점인 마르딘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는 마르딘에서 경험하게 될 엄청난 일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마르딘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나타난 거대한 산성 도시 마르딘은아나톨리아의 끝자락에 있는 고대 도시로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땅입니다. 


해발 1000미터의 거대한 하나의 산을 향해 들어가는데 가까이 갈수록 큰 산 전체가 하나의 도시로 덮여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산을 덮고 있는 시가지가 구 마르딘이며, 지금 그 산을 넘어 남쪽 산 밑으로 엄청난 규모의 신도시(신 마르딘)가 높이 솟은 빌딩, 아파트등과 함께 산 밑에 펼쳐집니다. 구 마르딘은 수천 년 세월동안 고대 수리아정교회, 아르메니아정교회, 이슬람 모스크 등 다양한 종교들의 본부역할을 해 온 종교도시였고, 온 건물이 오래된 벽돌로 지어진 고대도시 분위기였습니다.



가난한 서민들과 빈곤층은 구 마르딘에 살고, 중산층과 부유층들은 신 마르딘에 거처를 잡고 살아갑니다. 마치 마르딘은 헌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큰 거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평신도 사역자인 엔델 패커는 쿠르드민족이었습니다. 디야르바크르에서 우리가 하룻밤 묵었던 현지인 교회가 3년 전 마르딘에파송한 선교사입니다. 그가 자기의 집으로 인도 하면서 오늘 저녁 여러 손님이 오시게 되어 같이 시간을 보내자 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아내와 5살, 세 살, 두 살짜리 인형같이 예쁜 세 딸이 있는 매우 행복하고 평안한 가정이었습니다. 저녁에 온 손님들은 그와 같이 동역하는 독일인 선교사 말크스. 서부 코샤다스에서 온 독일선교사 안드레아와 루돌프, 그리고 독일교회에서 대표로 온 발드마와 루디라고 하는 집사들이었습니다. 엔델 패커 선교사의 소개로 서로 인사를 한 후 이슬람식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 그들은 본격적인 대화를 가졌습니다. 독일어와 터키어가 섞여서 오가는 대화를 듣는 중에 안드레아 선교사가 제 곁으로 일부러 와서 영어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역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독일교회연합에서 두 대표를 보내 터키에 국경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만 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구제할 방안을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독일대표들의 입장은 시리아난민들의 자존심을 배려하면서 교회가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동시에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의 1차 예산은 수만 달러. 난민 구제 사역이 성공적이라 판단되면 이어서 2차, 3차를 계속해서 지원할 계획인데 그 일을 두 대표에게 일임한 것입니다. 두 대표는 사역지에서 독일교회가 믿고 선교비를 맡길 수 있는 책임 있는 사역자를 찾는 중에 마르딘의 엔델 선교사와 말크스 선교사를 추천 받고 온 것입니다. 여러 시간 그들은 대화했고 이제 시간이 깊어져서 두 대표는 맡길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 독일교회 대표 중 한분이 엔델 패커에게 이곳에 선교사로 오기까지 신앙 간증을 해 달라 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은 엔델 패커는 자기를 은은한 미소로 바라보는 아내를 보며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터키에서 태어났지만 쿠르드민족으로 살아왔다는 것. 쿠르드는 터키에게서 독립하길 원하는 민족. 쿠르드 독립을 위한 악명 높은 테러단체인 패케케에 가입하여 1년 여간 군사훈련과 폭파훈련을 받았다는 것. 상부에 지령에 따라 어디에 가서 폭탄을 몸에 두르고 자살테러 한번 성공으로 자기는 알라의 품에 안기는 것을 청년기 꿈으로 여겼다는 것. 그러던 그가 우연히 성경책을 접하게 되었고 훈련받는 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는 매우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분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 그러던 중 패케케에 대하여 점점 회의가 들고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는 야간에 목숨을 걸고 그곳을 탈출했다는 것. 탈출하자마자 이라크군에게 잡혔는데 국적이 터키인이라 터키군에게 인계되었고, 터키법정에서 패케케 훈련을 받았다는 죄명으로 15년 징역형을 받고 수감 되었다는 것. 그러나 무슨 일인지 1년 6개월 수감생활을 하던 중 특사로 석방되었다는 것. 석방되었지만 자신에겐 이미 청춘을 바쳤던 꿈이 산산조각 난 상태로 절망감과 자괴감에 빠져 고향인 디야르바크르 성벽 위에 올라가 자살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저만치에 보이는 빨간 십자가 싸인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예전에 성경책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곳을 찾았는데 수리아 정교회였다는 것. 그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더 알려고 애쓰다가 하나님 인도로 지금 자기를 파송한 다야르바크르 개신 교회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성경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되었던 때가 2007년 4월경. 그때 멀리 떨어진 말라티야에서 기독교인 세 명이 믿음을 지키다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는 그 순교자 중에 두 분은 목사님이셨지만 한분은 평신도인 우르라고 하는 터키인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그 우르 형제의 믿음을 계승하여 예수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목사님께 그 다음 주 곧 바로 세례를 받고, 4년 여간 교회에서 신앙훈련 받은 후 이 곳에 파송 받아 오게 되었다는 것.....! 저는 지금 그의 음성과 자세. 그가 말한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 그때 받았던 엄청난 은혜를 이 글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슬프고 안타깝지만 그의 간증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습니다. 간증을 마치자마자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들의 임무를 엔델 패커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고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그들은 그때까지 그들 곁에서 계속 듣고 있던 우리 피터김 목사에게 기도회 인도를 청했습니다. 피터 목사님이 인도하는 그 기도의 시간은 성령이 뜨거운 은총을 모두의 가슴에 폭포수처럼 부어 주신 시간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 모두는 그들이 도우려고 하는 시리아 난민들이 우거하는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산재하여 도시속의 폐허 가옥들 속에, 개천 밑에, 외진 수풀 속에, 거적때기 하나 덮고, 식수도 없고, 전기도 없고,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하루하루 소망도 없고 꿈도 없고 오직 그들의 눈빛은 겁에 질린 눈빛, 가족 중 누군가는 정부군 폭탄에 죽임을 당하였고, 가족 중 생사를 알지 못하는 가족이 즐비하고.. 도대체 이들에게 어디서부터 손을 펼쳐야 할지 너무 비참해서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상태로 줄줄 눈물만 흘렀습니다. 그들을 둘러보고 난민촌을 떠나오는 데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그들을 놓아두고 가는 것 자체가 큰 죄 짓는 것 같은 아픈 마음으로 우리는 공항을 향했습니다. 공항 가는 내내 차안은 경적이 흘렀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는 공통의 생각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항에 내려 서로 인사하기 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뺑 둘러서서 합심하여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그리고 서로를 축복하며 천국에서 보자하며 헤어졌습니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향해 독일인 말크스 선교사가 “어제 당신들이 우리 대화가운데 있어 주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다고 말하며, 꼭 다시 한 번 오세요. 하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피터목사와 나는 말없이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서로 바라보며 침묵의 미소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선교 순례 길에 동행해 주신 성령께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